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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화 ― 기록이 시작되는 날

수연은 죽지 않았다.

확실히 말하자면,

죽었다고 느낄 틈도 없었다.

퇴근길, 횡단보도.

초록불.

휴대폰을 보며 한 발 내디딘 순간—

세상이

툭, 하고 꺼졌다.

소리도, 충격도, 고통도 없이.

그냥 화면이 전환되듯.

그리고 다음 순간.

수연은

풀 냄새가 나는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

눈을 뜨자,

하늘이 너무 파랬다.

서울의 하늘이 아니라,

사진 속에서만 보던 색.

구름은 느리게 움직였고,

바람은 시원했다.

수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팔.

다리.

멀쩡했다.

아픈 데도 없고,

피도 없고,

차도 없고,

사람도 없었다.

대신—

끝없이 이어진 초원과,

멀리 보이는 숲,

그리고

돌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 하나.

"…이게 뭐야."

꿈이라고 하기엔

냄새가 너무 진했고,

햇빛이 너무 따뜻했다.

수연은

손을 쥐었다 펴봤다.

촉감이 있었다.

그때였다.

시야 한가운데,

공기가 물결치듯 일그러지더니—

문장이 떠올랐다.

기록 대상 확인

이름: 수연

상태: 전이

기록 개시

수연은

순간 숨을 멈췄다.

"…뭐야."

누가 쓴 자막 같았다.

게임 UI?

홀로그램?

증강현실?

손을 휘저어 봤다.

문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떠봤다.

그대로 있었다.

"…미쳤나."

수연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

카메라.

장치.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문장은

분명히 '본다'는 감각으로 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겹쳐진 느낌.

수연이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이거… 나한테만 보이는 거네.

그 순간,

문장이 바뀌었다.

인식 확인

기록 안정화 중…

수연은

소름이 돋았다.

"…야."

대답은 없었다.

문장은

잠깐 흔들리더니

새 줄이 추가됐다.

아카이브 연결 완료

"아카이브?"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수연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누군가와

연결됐다는 느낌.

소리도, 목소리도 없는데,

분명히

'시선' 같은 것이 닿아 있었다.

위치: 미기록 세계

환경: 안정

개입 가능성: 미정

"…이거 꿈 아니네."

꿈이었으면

이렇게 구체적일 리 없었다.

수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이

정상 속도로 뛰고 있었다.

놀랐지만,

이상하게도

패닉은 오지 않았다.

수연은 원래

이상한 상황에서

먼저 상황을 본다.

"일단… 마을부터 가보자."

혼잣말처럼 말하고

발을 옮겼다.

풀잎이

신발 아래에서 바스락거렸다.

마을로 가까워질수록

사람 소리가 들렸다.

웃음,

대화,

나무 두드리는 소리.

사람은 있다.

그 사실 하나로

조금 안도됐다.

돌담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

"누구야?"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수연에게 꽂혔다.

여기 사람들은

중세풍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색도, 눈색도 다양했다.

코스프레 촬영장이면

차라리 이해가 됐을 텐데.

여긴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저… 길을 잃어서…"

수연은

일단 가장 무난한 말을 꺼냈다.

그때,

아카이브가 반응했다.

외부 시선 증가

심리 파동 감지

수연은

눈을 깜빡였다.

'심리… 파동?'

그리고 바로,

이상한 걸 느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에게서

묘하게

거친 감정이 묻어 나왔다.

말은 안 했는데,

짜증.

경계.

불안.

마치 공기처럼.

수연은

자기도 모르게

그를 다시 봤다.

그 순간,

문장이 하나 더 떴다.

감정 편차: 불안/적의 혼합

기록 권장

"…뭐?"

수연의 입에서

작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이게 단순한 상태창이 아니라는 걸.

이건—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마을 안쪽에서

누군가 외쳤다.

"또 싸움이야!"

"회관 쪽이래!"

순간,

사람들이 술렁였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뒤를 돌아봤다.

"젠장… 또 시작이네."

수연은

그의 등을 보며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아카이브가

조용히 한 줄을 띄웠다.

갈등 발생

기록 우선도: 상승

수연은

아직 몰랐다.

이 날이

자기가 이 세계에서

'구경하는 사람'으로 끝나는 날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이 기록이—

자기를 바꿀 기록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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